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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레슬링 단체 정리 [한국]


 

* [주요] 선수 프로필


김덕
김일


노지심

레더 페이스


이왕표





* 한국 프로 레슬링의 역사


한국 프로 레슬링의 역사는 1957년 6월 격투가 출신의 김청수가 프로레슬링 시합을 정식으로 개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프로레슬링의 대부 역도산의 허락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1961년, 대한 프로레슬링이 체육 협회에 가맹되면서 한국 헤비급 챔피언으로 장영철이 올랐다. 1965년 6월 일본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있던 김 일이 귀국하면서 한국 프로레슬링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는데, 8월에는 극동 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를 개최. 8월 11일 결승에서 김 일이 요시노 사토를 꺾고 초대 챔피언에 오르면서 한국 프로레슬링 맹주의 자리는 장영철에서 김 일로 바뀌었다.



"김 일 이전의 1인자, 장영철."


극동 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의 성공에 힘입어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 측에서 김 일에게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선수도 참가하는 기획의 대회를 김 일에게 요청했고, 김 일은 일본 프로레슬링 시합 스케줄을 끝낸 해외 레슬러들에게 부탁하여 11월 26일, 장충 체육관에서 5개국 대항 프로레슬링 선수권을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대회에서 한국 프로레슬링 역사를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오오쿠마 모토시 린치 사건. 이른바 "레슬링은 쇼" 발언이 터진 사건이다.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김 일."


잠시 사건의 발단을 알아보자면 김 일이 귀국한 1965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일이 귀국한 다음날,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의 임원 한명이 선수들을 모아놓고 "김 일 선수는 역도산에게 레슬링을 배웠고, 미국에서도 챔피언이 된 대 스타이니, 앞으로 여러분들은 김 일 선수를 스승과 같이 모시고 본격적인 프로레슬링을 배우라"는 요지의 말을 했고 이는 당연히 당시 한국 헤비급 챔피언인 장영철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장영철은 선수들에게 자신에 편에 설 것을 강요했고, 김 일은 일본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선수들을 포섭해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파벌이 형성되었고, 극동 챔피언 토너먼트가 종료될 즈음에는 당시 장영철과 더불어 한국 톱 레슬러 천규덕과 넘버 2 박송남은 이미 김 일의 사이드에 섰고 이는 장영철의 분노를 샀다 (더군다나 이때까지 무패였던 장영철의 연승이 깨진 것이 이 대회라고 한다. 일본 쪽 기록에 의하면 69연승을 했다고 한다.). 장영철은 부하들을 시켜 박송남을 납치해 경기도 전방의 문산에 감금시켰고, 197cm, 118kg의 거구 박송남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탈수 증상까지 보이다가 UN군 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훗날 박송남을 찾아간 장영철은 사과는 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든 김 일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는 부탁을 했다고 전해진다.

다시 1965년 11월 27일로 돌아가서 이날 장영철은 오오쿠마 모토시와 토너먼트 1회전에서 맞붙게 되어 있었다. 덧붙여 오오쿠마 모토시는 주로 오프닝 매치를 전담하는 선수로 메인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편 김 일의 1회전 상대는 유세프 터키. 장영철과 김 일 모두 1회전에서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고, 대진표 상 2회전에서 둘의 격돌은 거의 확실시 되었다. 그런데 시합은 오오쿠마의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 되다가 오오쿠마가 보스톤 크랩 (일본 쪽 기록에는 카멜 클러치)을 걸자, 장영철이 세컨드에 도움을 요청. 그러자 세컨드에서 오오쿠마를 집단 공격. 병까지 들고 오오쿠마를 때리고, 안면에 공격을 퍼부어 오오쿠마의 코가 꺾이는 중상을 입었고 전치 2주 진단이 나왔다.



"오오쿠마 모토시"


이날 장영철은 대진표의 요구했다가 묵살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미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김 일이 평소보다 많은 경찰 인력을 배치했고 이 집단 린치는 경찰들에 의해 곧 진압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 기록에 의하면, 세컨드의 집단 공격을 하는 중에 장영철이 마이크를 잡고 김 일에게 한판 붙자는 말을 하여 관객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연출했다고 한다. 거기다 경찰 조사에서 프로레슬링의 규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프로레슬링 특유의 규칙을 경찰과 언론에서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은 "프로레슬링은 다 쇼다."라는 인식이 우리나라 전역에 팽배해지는 일을 불러왔다.

한편 이 사건은 오오쿠마는 김 일이 불러온 “폴리스맨”아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는데 (폴리스맨이란 프로레슬러 중 실전 능력을 갖춘 선수들을 일컫는 말로, 주로 단체에서 말을 듣지 않는 선수들을 혼내기 위해 불러오는 경우를 폴리스맨을 불러왔다고 한다.) 실제로 장영철은 “오오쿠마의 배후에는 김 일이 있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일은 이에 대해 완강히 부정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되기 까지에는 장영철의 잘못만 있다기 보다는 김 일의 잘못도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김 일 본인을 제외한 다른 레슬러 (장영철, 천규덕을 비롯한 탑 레슬러들부터 오프닝 시합 출전 레슬러들 까지)들의 출전료를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그것도 똑 같은 가격으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촌극에도 프로 레슬링의 인기는 식지 않았는데, 1966년에는 사단법인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67년 6월에는 김 일이 마크 루인을 꺾고 WWA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싱글 타이틀 획득이기도 하다. 9월 17일에는 장영철과 천규덕의 한국 헤비급 타이틀전이 벌어졌으나, 난투극으로 변하면서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경기를 선보이지 못해 당시 신문 기사에 당시 경기 내용에 대한 비판이 실렸었다. 또한 67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하사금 2억으로 재단법인 김 일 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김 일 체육관도 설립되어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되었다. 1968년에는 NWA 연맹에 가입 (자이언트 바바의 추천으로 김 일이 한국 프로모터 자격으로 가입했다고 알려졌다.). 1969년에는 김 일 후원회 초대 회장으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취임.



"김 일과 김 덕의 사제 태그."


1972년 12월에는 장충 체육관에서 보보 브라질의 인터네셔널 헤비급 타이틀에 김 일이 도전했고 김 일만큼이나 박치기로 유명한 보보 브라질이었기에 박치기 세계 최강전이기도 한 이 시합에서 김 일이 승리하여 루 테즈, 역도산 등 강호 레슬러들이 거쳐간 인터네셔널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 후 김 일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등장하면서 안토니오 이노키, 사카구치 세이지 등 신일본의 탑 레슬러들이 우리나라에서 김 일과 격전을 치루기도 했다. 1975년에는 김 일이 신일본을 떠나 자이언트 바바의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오르면서 전일본과도 제휴가 시작. 김 일과 김 덕의 사제 태그와 자이언트 바바와 점보 츠루타의 사제 태그간의 불꽃 튀는 대결이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벌어졌고, 실제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이 대립은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주었고 1977년 11월 7일에는 자이언트 바바와 점보 츠루타가 보유하던 인터네셔널 태그 타이틀을 김 일/김 덕의 사제 태그의 손에 들어오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에는 김 일 외에도 수 많은 국내 레슬러들이 일본 혹은 미국으로 진출해 좋은 활약을 보였는데, 그 선두주자가 박송남이었다. 박송남은 김 일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더스티 로즈, 테리 펑크, 도리 펑크 주니어, 잭 브리스코 등 역대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들과도 자웅을 겨루었으며, 그들에게서 승리를 거둔 적도 있을 정도이다 (여담으로 2003년 NWA가 내한했을 때, 레이븐이 당시 몇몇 레슬링 팬들에게 더스티 로즈의 눈을 파냈던 백 송은 어찌되었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박송남은 감금 사건 외에도 또 다른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바로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시멘트 사건이다. 일명 "박송남 눈 파내기 사건"으로도 불리우는데, 1976년 10월 9일과 10일의 양일간 시합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일컫는 사건이다.



"박송남은 해외에서 굉장한 활약을 벌였었다."


시합은 싱글 매치 2연전으로, 10월 9일에 대구에서 전초전. 하루 뒤 10월 10일에는 서울에서 이노키의 NWF 헤비급 타이틀에 박송남이 도전하는 타이틀 매치가 결정되었다. TV 중계가 되지 않았던 9일 대구에서 시합은, 이노키가 프로레슬링의 암묵의 룰을 무시하고 시멘트를 걸어 박송남의 눈에 손가락을 찌르는 등, 처참한 결과를 불러왔다.

결과는 노 콘테스트. 당초 TV 중계가 있는 서울에서 타이틀 매치는 이노키가 이기는 대신, 대구에서 전초전은 박송남에게 승리를 양보한다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시합 직전 이노키가 패배를 일방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리얼 파이트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 이노키는 사전 승낙 없이 NWF 방어전이 결정된 것에 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9일 밤에 협회 측의 요청으로 이노키가 박송남에게 사죄. 다음 날 NWF전은 일반적인 프로레슬링 시합을 했지만 (이노키의 링 아웃 승리), 이때도 승패를 둘러싸고 이노키와 주최자측 간의 트러블로 시합 전에 험악한 상황이 되어, TV 생중계 중임에도 불구하고 시합 개시 1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없는 링을 비추고 있는 이상 사태를 불러왔다.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로레슬링에 지원 되던 보조금 등이 거의 사라지고, 김 일 체육관마저 몰수 당하고 김 일 체육관은 정동 문화 체육관으로 명칭이 바뀌어 운영되어 버렸다. 1981년 6월 24일에는 김 일의 퇴진을 대한 프로레슬링이 요구. 바로 김 일이라는 거대한 존재 때문에 신 세대인 이왕표, 임대수 등의 출세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김 일 후원회는 반발했고,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와 김 일 후원회 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내부 싸움은 계속되어 침체 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81년에는 김 일이 인터네셔널 헤비급 타이틀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반납하고 대신 1977년에 바바가 획득한 후 봉인했던 아시아 헤비급 타이틀을 가져왔다.

1982년 1월에는 협회 집행부를 개편하고 협회는 행정 업무만을 전담하는 공인 기구로 남고 각종 프로레슬링 흥행은 협회가 인정하는 프로모터들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을 정하고 앞으로 국내 대회는 김 일 후원회, 한국 프로레슬링 흥업 회사, 한국 여자 프로레슬링 프로모션에서 주도 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두 달 뒤 3월 7일에 김 일측 선수 및 심판 14인은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에 탈퇴서를 제출. 협회의 무능과 권리 남용을 규탄하는 건의서를 각 계에 제출했다. 사실상 김 일 후원회의 협회 탈퇴였다. 탈퇴의 직접적 원인은 지난 3월 4일 김 일 후원회가 잠실 체육관에서 주최한 프로레슬링 인터네셔널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을 불법 대회로 규정 짓고 김 일 도장 선수들에게 징계 움직임을 보이면서이다. 협회 회장단이나 집행진이 김 일 측의 의견을 무시하고 상대편 세력들로만 구성된 것이 김 일측이 협회를 불신하는 가장 근본적 이유로 알려졌다.

그 후 김 일 후원회는 김 일 프로모션으로 명칭을 바꾸고 김 일이 대표로 취임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1982년 5월에는 김 일이 아슈라 하라를 상대로 아시아 헤비급 타이틀 매치를 꺾고 승리했다. 그리고 이 시합을 끝으로 박치기로 인한 지병으로 사실상 은퇴. 1986년에는 선수 생활 동안 축적된 부상이 심해져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80년대에는 관련 문헌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짧은 내용으로 밖에 쓸 수 없는데, 앞에서 언급한 내분과, 국가적 지원 중단에도 불구하고 이왕표, 역발산, 임대수, 김수홍 등을 대표하는 2세대 레슬러들은 꾸준히 활동하며 일본에도 진출했는데, 이왕표는 날쌘 움직임으로 안토니오 이노키로부터 쟈칼이라는 별명을 하사 받았으며, 1985년에는 NWA 오리엔탈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 했으며 같은 해에는 김 일 프로모션의 대표로 취임했다. 1987년에는 NWA 오리엔탈 헤비급 타이틀도 획득하는 성과도 보였다. 역발산은 국제 프로레슬링,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하다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머신 군단의 스트롱 머신 2호로 활동하며 굉장한 인기를 끌었으며, 김수홍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했으며, 무토 케이지, 쵸노 마사히로와 함께 훈련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2세대 레슬러들의 이러한 노력과 일본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한국 프로레슬링은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이 흐름은 1990년대를 이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되기 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오오쿠마 린치 사건과 더불어 프로레슬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적극적인 지원자가 사라진 것이 치명적이며, 1980년 무렵 일어난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프로레슬링 방영에 적극적이던 TBC가 사라진 것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또 하나로 김 일이 수산 회사 경영을 위해 사실상 은퇴를 했던 1980년대에 프로레슬링 흥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프로레슬링계는 흥행 개최를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 즉 WWA 쪽 기록이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상황이다.

1990년 8월 10일에 극동 헤비급 타이틀이 부활하면서 이왕표 선수가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훗날 GWF로 전장을 바꾸면서 타이틀은 봉인된다. 1993년에는 김 일 프로모션이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왕표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에는 JBL로 훗날 WWE의 메인 이벤터가 되는 빅 자니 호크를 꺾고 GWF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부커 T, 마이크 어썸 등을 물리치고 23회나 방어하자 GWF에서는 이왕표를 영구 챔피언으로 임명하나 GWF는 1994년에 운영이 정지되기에 영구 챔피언으로 임명한 것은 아마도 단체가 문을 닫으면서 타이틀을 아예 양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994년, 일본에서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던 김 일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을지 병원에서 무상으로 입원 치료를 받기로 하면서 귀국. 국민 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1995년 4월 2일 일본의 주간 프로레슬링 주최 도쿄돔 대회에서 김 일의 은퇴 세레모니가 있었다. 같은 해에는 김 일이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 초대 총재로 취임.

2000년 3월에는 김 일의 국내 은퇴식이 있었으며 체육 훈장 맹호장을 수상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은 WWA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발. 회장으로는 전설의 레슬러 루 테즈가 맡았다. 뿐만 아니라 2000년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재도약을 전면적으로 시도한 해이기도 한데, 바로 영화 반칙왕의 흥행 성공으로 프로레슬링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자, KBS2 TV의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에서 개그맨 백재현이 프로레슬러에 도전하는 “박치기 왕”이라는 코너도 나왔으며 성공적이기도 했지만 백재현 본인이 힘들어 하고, 좋아하지 않아서 계획보다 빨리 끝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2000년 말에는 MBC 코미디 하우스에서 개그맨과 프로레슬러가 태그를 짜서 태그 매치로 격돌하는 코너가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폐지…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도 금방 식어 버렸다.



"WWA의 로고"


2002년 9월 16일에는 신한국 프로레슬링이 장영철, 천규덕, 역발산 등이 주축이 되어 출범되었다. 또한 이 무렵 WWE가 국내 케이블 채널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면서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시작되나 이는 한국 프로레슬링이 아닌 WWE에 관한 관심도여서 침체된 한국 프로레슬링이 부활의 신호탄이 되지는 못했다.

2004년 11월 6일에는 신한국 프로레슬링에서 전용 경기장을 잠실 실내 체육관 내에 마련 했으며, 2005년 초~중반기에 소속 선수들이 도장 매치로 주말 마다 치루기도 했다. 2006년 2월 10일 광명에서 대회를 개최하는데, 20여년 만의 MBC에서 생중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후 2008년 5월 5일에는 AJ 스타일스, 커트 앵글, 니시무라 오사무등 유명 해외 선수들의 참전으로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커트 앵글이 시합 중 목에 부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여 소속 단체인 TNA에서 부상 당한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3월 21일에도 대회를 개최 하는데, 크리스토퍼 다니엘스, 피티 윌리엄스, 드래곤 게이트의 선수들이 방한 하였고, 김남석 같은 유망주도 일본에서의 유학 중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신한국 프로레슬링은 자금난으로 운영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홈페이지도 닫힌 상태이다.

한편 2006년 2월 8일에는 약 40여년간 원수로 지내오던 김 일과 장영철이 화해했다. 그러나 6개월 뒤 장영철이 중풍과 치매 등으로 사망하고, 10월 26일 김 일도 만성 신부전증과 신장 혈관 이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WWA에서는 10월과 11월 사이에 김 일 추모 대회를 해마다 열고 있으며, 2008년 11월에는 밥 샵과 이왕표의 MMA전이 울트라 FC 타이틀을 놓고 격돌하나 MMA를 이름을 사용한 프로레슬링 시합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경기는 일본에서도 이종격투기 전이라는 이름으로 프로레슬링에서 이미 70년대부터 안토니오 이노키가 해오던 시합이었고 프로레슬링 시합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MMA 룰이라는 것은 대중들에게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것이 이러한 부작용을 불러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시합 전 기자회견으로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굉장한 화제를 불러왔기에 어느정도는 성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09년 10월에는 밥 샵과 이왕표의 WWA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밥 샵이 승리하여 거의 10여년 간 타이틀을 방어해 오던 이왕표의 WWA 타이틀이 밥 샵에게 넘어갔다.



"오랜만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오긴 했지만..."


2010년, 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무한 도전”에서 프로레슬링에 도전하는 에피소드가 방영 되었고, 방영 과정에서 여러가지 논란이 불거져 나오는데, 8월 19일 당일 시합 날에는 방영 내내 비판을 가해오던 김남훈이 트위터에 “윤강철이 무한 도전의 꾐에 속아서 무한 도전에 우스꽝스럽게 출연한 이유로 신한국에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해있으며 자술서도 썼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윤강철은 “녹화 과정에서 무한 도전측에서 출연료를 제때 주지 않았고 프로레슬링을 우롱했다.” 라는 요지의 글을 남겼고 이 또한 논란을 불러왔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김남훈과 윤강철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갔으며, 무한 도전의 김태호 PD도 이에 관한 반박을 하면서 더더욱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현재 윤강철은 향후 2년 간 국내에서 시합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상황이며, 김남훈은 이 논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저런 논란과 불리함, 침체에도 불구하고 젊은 선수들의 고군분투가 이어지고 있는데, WWA의 김민호는 일본의 프로레슬링 노아에서 훈련을 꾸준히 받으며 WWA 시합이 있을 때마다 시합을 갖고 있으며, 김남석은 일본의 카이엔타이 도장에서 활동과 훈련을 하고 있다. 그리고 김남석에게 레슬링을 배운 조경호가 현재 호주의 AWF에서 활동 중이다.

* 현재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단체

WWA (World Wrestling Association)
NKPWA 신한국 프로레슬링 협회 (New Korea Pro Wrestling Association)
AWF (Asia Wrestling Federation), 일명 최태산 프로모션
PLA (Professional Live Action)

 


* 작성자:
Cactus™ [http://grgrkk.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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