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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W 소개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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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일본(全日本) 프로레스 소개와 역사



1971년에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추방되자, 이 여파는 일본 프로 레슬링의 TV 중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에는 NTV와 NET TV (현재의 TV 아사히), 두 방송국의 방영 체재였는데, 안토니오 이노키는 NET TV의 핵심 선수였기 때문에 핵심 선수를 잃은 NET TV는 그에 걸맞는 대체자를 요구하며 자이언트 바바의 참전을 요구한다. 결국 일본 프로 레슬링은 NTV와의 계약을 어기고 자이언트 바바를 NET TV 측에서 중계를 하는 대회에 참전시키기로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NTV측은 일본 프로 레슬링 중계를 중단하기로 결정. 그리고 일본 프로 레슬링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NTV측은 자이언트 바바와 접촉하게 되면서, 이는 결과적으로 자이언트 바바가 독립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1972년 7월 29일, 자이언트 바바는 일본 프로 레슬링을 탈퇴함과 동시에 신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NTV의 후원을 등에 업은 자이언트 바바는 해외 유명 선수들을 초대하게 되면서 그 결과 프릿츠 본 에릭, 도리 펑크 Sr., 브루노 삼마르티노 같은 선수들이 초대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 참전하게 된다. 게다가 당시 일본 프로 레슬링의 신진 선수이자 역도남의 차남이였던 모모타 미츠오, 역도산의 미망인인 모모타 케이코 역시 개양전에 참가함으로써, 사실상 역도산가의 보증을 등에 업게 된다.

자이언트 바바는 미래 프로레스 계를 이끌 신인 양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개양 직후 뮌헨 올림픽의 일본 국가대표 멤버였던 츠루타 토모미 (훗날 점보 츠루타로 활약하게 된다.) 를 픽업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바바는 츠루타에게 영재 교육을 베풀기 위해서 미국의 펑크 도장에 1년간 보내게 된다.




이후 일본 프로 레슬링 단체가 붕괴되면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자이언트 바바와 점보 츠루타를 중심으로 큰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자이언트 바바는 미국에서의 인맥을 살려서 NWA 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명한 미국 레슬러들을 섭외하여 미국 레슬러 vs. 일본 레슬러라는 매치 메이킹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이것은 역도산 시대때 선보여지던 '일본 레슬러 vs. 외국 레슬러' 를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움직임들이 재평가 되고 있는데, 우선 WWE로 대표되고 있는 미국 프로 레슬링의 원류를 일본 프로 레슬링계에 첫 소개를 한 것과, 프로 레슬링의 특유의 접수의 미학등을 선보인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압둘라 더 부처 vs. 쉬크를 통한 유혈전도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훗날 데스 매치 노선으로 운영되던 인디 단체들의 원조격이 아니였나라는 의견도 있다.

 


1981년부터는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턴 한센이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활동을 하게 되고, 자이언트 바바가 본인의 나이로 인해서 타이틀 전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후에는 '밝고, 즐겁고, 그리고 격렬하게' 라는 캐치프라이즈를 내세워 매치 메이킹이 주로 일본인 선수들을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는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중계권을 가지고 있던 NTV의 관련이 매우 깊었던 시기였는데, 많은 NTV 관계자들이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 재적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텐류 겐이치로를 중심으로 '보는 이들에게도 고통이 전해지는 프로 레슬링' 이 전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승세 속에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뜻하지 않은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1987년에 소노다 카즈하루 (하루 소노다) 가 신혼 여행 겸, 원정 경기 겸 남아공으로 여행을 하던 도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부인과 본인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소노다는 젊은 선수들을 코치하는 역할도 병행했었기 때문에, 전일본 측에겐 적지 않은 타격이였었다고.


자이언트 바바가 타이틀 전선에서 물러난 아래, 점보 츠루타와 텐류 겐이치로, 그리고 스턴 한센같은 용병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어가던 타이틀 전선이였으나, 1990년에는 텐류 겐이치로를 중심으로 선수, 임원 그리고 심판 13명이 전일본을 탈단. 이대로 위기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 타이거 마스크 2세로 활동하고 있던 미사와 미츠하루를 중심으로 초세대군이 점보 츠루타에게 대항하는 구도가 탄생함으로써 새로운 붐을 일으켜 정규군 vs. 초세대군 vs. 외국인 레슬러들이라는 스토리 라인을 주축으로 운영되게 된다.





미사와 미츠하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초세대군의 선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점보 츠루타가 병으로 인해서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 이들은 어느덧 츠루타의 공백을 충분히 메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사와 미츠하루, 카와다 토시아키, 코바시 켄타, 타우에 아키라.. 이 4천왕을 중심으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운영되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미사와와 카와다의 경기들은 일본 프로 레슬링, 나아가 프로 레슬링을 대표하는 라이벌 관계로써, 이들의 경기에 영감을 얻어 프로 레슬러가 된 프로 선수들도 수두룩 하다.

자이언트 바바조차도 혀를 두르게 되었던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고난이도 왕도 스타일속에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일본 무도관에서 연관 7회나 흥행을 개최하였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된다. 이 상승세는 계속되어 1998년에는 무려 도쿄 돔에서도 첫 흥행을 개최하기도.

 


하지만 1999년에 자이언트 바바가 사망을 하게 됨으로써, 미사와 미츠하루가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미사와 미츠하루는 개혁을 시도, 자이언트 바바때와는 달리, 빅 매치를 중심으로 대담한 카드 편성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선보여지고 있던 하나미치 (주 : 선수들이 입장하는 통로.) 나 레이저 광선등을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이들의 이러한 계획들은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자이언트 바바의 미망인인 모토코 바바와의 마찰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5월 28일, 도쿄 코라쿠엔 홀에서 있었던 경기 이후 긴급 소집된 간부회의에서 미사와는 다수 투표결과로 인해 결국 임역 사장직에서 해임되게 된다. 그리고 모토코 바바는 2주 뒤, 미사와 미츠하루의 계약이 종료되는 즉시 전일본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한다.

미사와는 그 전부터 개혁을 원해왔으며, 때문에 과거 전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디 출신의 레슬러들이 왕도의 링에서 경기를 가진다거나, 예정되어 있던 삼관왕전을 시리즈 중에서 개최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외 무도관 5대 싱글 매치 등을 자신의 머리속에 구상하고 있던 것을 실행함으로써 임원회의 비난을 받았다. 지금이야 다르지만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지금보다는 좀 더 보수적이였기 때문에 단체간의 교류가 활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타 단체에 참전하면 '배신자' 취급을 받곤 했었다. 故 자이언트 바바의 부인인 모토코 바바는 보수파였기 때문에 이런 모토코의 시선에 미사와는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터.

거기다가 미사와는 전일본의 주식 지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허수아비 사장이나 다름이 없었을 뿐더러, 이벤트 등 관련 물품이 판매되어 들어오는 수익도 모두 모토코가 운영하던 회사로 유입이 되는 바람에 선수들에게는 수익이 오기는 커녕, 그것이 알려지지조차 않는 등, 급여 조건이 라이벌 단체인 신일본에 비해 그렇게 좋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미사와는 신일본 프로 레슬링의 에이스였던 무토 케이지와 무려 3배 차이가 났으며, 주니어 선수였던 카네모토 코지가 미사와와 같은 급여를 받았다.)

그 외에 미사와 미츠하루는 선수들의 급료를 올리고 싶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관중 감소가 수익 감소로 이어졌기에 돈이 없다고 모토코 바바는 언급하며 둘 간의 금전적인 대립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기존부터 처우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이 전일본에 남았던건 故 자이언트 바바 때문이였는데, 자이언트 바바가 없는 지금, 선수들은 물론이고 미사와는 더더욱 저런 모토코의 반발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6월 13일에 있었던 회의 이후 미사와외의 6명이 더 사직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중에는 모모타 미츠오 (공동 부사장), 코바시 켄타, 타우에 아키라, 오야기 켄이치, 모모타 요시히로가 포함이 되어있었다. 동시에 이들은 임원직에서 사임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반 팬들은 이같은 사건에 엄청나게 놀라워하고 있었으나, 업계 관계자들은 이렇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고 한다.

다음 날인 14일에는 모토코 바바가 2페이지나 되는 성명을 통해 "미사와 미츠하루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 여우에 홀린 기분이다." 라며 강도높게 비판. 그리고 카와다와 후치만이 전일본에서 남게될 유일한 레슬러가 될 것이라는 식으로 언급을 하였는데, 카와다와 후치만이 바바상의 마지막 소원이였던 전일본 생존을 위해 수행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편 그 와중에 미사와는 도내에서 잠깐의 취재에 응했었는데, "나는 한다면 절대로 하는 사람이다. 도중에 관둘 것 같으면 애당초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은퇴는 무슨 은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라며 강한 어조로 밝혔다. 그리고 만약의 전일본의 요청이 있어서 조건에 맞는다면, 프리의 신분으로써 전일본의 흥행에 참전하겠다고 언급하였다.

6월 15일에는 모토코 바바가 전날 언급한대로, 카와다와 후치만이 전일본 프로 레슬링측과 재계약을 한 레슬러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 프로레스계를 대표하는 심판인 와다 쿄헤이 심판 역시 재계약을 하였다. 카와다는 이날 "바바상의 이름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게 내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입니다. 임원직의 한 사람 보다도, 레슬러로써 더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자신이 맡아왔던 이사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레슬러로써 전념할 방침이라고 하였는데, 흥미로운건 미사와 미츠하루에 대해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카와다는 이날 미사와에 대해 "전일본을 나가는 것으로 미사와씨가 발전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을 겁니다." 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6월 19일에는 창단아래 꾸준하게 전일본 프로 레슬링을 중계하였고, 사실상 전일본 프로 레슬링이 탄생했던 원인이였던 NTV 측에서 27년간의 중계를 종료하고 더 이상 전일본 프로 레슬링을 중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졸지에 메인급 선수들과 방송국을 잃어버리게 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이였으나, NTV측이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15% 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중계권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도록 다른 방송국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이러한 위기에 처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을 존속시키기 위해 여러 선수들이 발벗고 나서서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 참전하게 되는데, 우선 1990년에 전일본 대량 이탈 사건을 일으켰던 주범인 텐류 겐이치로가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사실상 은퇴에 접어들고 있었던 스턴 한센 역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22일에는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미사와, 코바시, 타우에 중 그 어떤 선수도 참전하지 않은 무도관 흥행이 열리게 되었는데, 상당히 빈약한 라인업으로 흥행 실적이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스턴 한센이나 텐류 겐이치로의 복귀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신일본 프로 레슬링과의 교류를 통해 단체를 존속시킬 수 있었으며, 2002년에는 무토 케이지가 신일본 프로 레슬링의 방향성에 회의감을 느끼고 전일본 프로 레슬링으로 이적. 2월 26일에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 입단하게 된 무토 케이지는 이후 9월 30일에 모토코 바바를 대신하여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다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주식 양도는 없고, 다시 소유자와 급료를 받는 사장 형태로 알력이 생겼다고. 그 후, 카와다와 후치 마사노부, 와다 쿄헤이가 모토코 바바에게 '주식 양도 호소서' 를 제출하면서 무토 케이지는 무상으로 주식을 양도받게 된다.)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새로운 운영진들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함께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우선 무토 케이지의 체재아래 가장 먼저 바뀌었던 것은 바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단체 노선이였는데, 그동안 왕도 프로 레슬링을 선보여오던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패키치 프로 레슬링' 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후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는 악역 스테이블이 등장하여 예전의 전일본 프로 레슬링보다 좀 더 가벼운 분위기의 프로 레슬링이 선보여지게 된다. 혹자는, 무토의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는 진지함과 웃음, 신예 선수, 악역 등이 알기 쉽게 배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할 정도.

무토 케이지 曰 "저는 패키지 프로레슬링이라는 부분, 그 말의 의미에는 제1시합부터 제7시합까지 온 힘을 다하는 시합은 하지 않도록 합니다.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유의하고 있지만, 도중에 웃음이 들어가면 의의로 힘을 다하지 않게 됩니다. 유의하고 있는 것은 온 힘을 다하는 시합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미 파이널에서 백드롭을 5발 사용하면, 메인 이벤트에서는 6발을 써야한다든가 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죠. 온 힘을 다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5시합째에는 백드롭을 3발, 그럼 6시합때는 6발, 이번에는 10발을 써볼까라든가, 저는 그런건 넌센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뭐, 이건 제 나름대로의 지론일 뿐입니다. 지금의 전일본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요."

매해 재정이 좋지 않다라는 루머는 계속해서 나돌고 있으나, 무토 케이지의 특유의 프로 레슬링 센스가 묻어나는 매치 메이킹과 지난 몇년간 꾸준하게 신인들을 양성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매해 팬들 사이에서 화제거리가 될 수 있는 이슈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2011년 5월에는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바로 TARU의 히라이 노부카즈 폭행 사건이였다. 2011년 5월 29일에 SUPER HATE 로 활동하고 있던 히라이 노부카즈가 경기 후 구토 증세 이후 졸도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급성 경막하혈종이라는 진단을 받고 긴급 수술이 이루어졌었다.

TARU는 이후 전일본 프로 레슬링측으로부터 징계를 받았고, 본인이 락커룸에서 히라이 노부카즈를 폭행했다고 시인. 이 여파는 꽤나 쎘기 때문에, 무토 케이지가 사장직에서 사임을 하고, 39년동안 전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일해왔던 일본 프로레스계에서 가장 유명한 심판인 와다 쿄헤이가 탈단. 또한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인기 힐 스테이블이였던 부두 머더즈는 자연스럽게 해산되었으며, 부두 머더즈의 일원들도 모두 무기한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속에서도 전일본 프로 레슬링은 내실을 잘 다져가면서 위기를 잘 넘기는데 성공했고, 단체의 에이스였던 무토 케이지가 전선에서 사실상 이탈하여 큰 경기나 수도권 흥행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재, 멋지게 성장한 신인 선수들이 무토 케이지의 공백을 메꾸고 있으며,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여전히 일본 프로 레슬링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단체이다.

 


* 작성: Tony [
http://puroresu.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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